아래글은 '대륙 조선사 연구회 홈페이지//www.chosunsa.co.kr에서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글입니다.
직접방문하셔서 읽어보시면 한국의 역사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 강단의 한국사(韓國史)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한국사(韓國史)를 조선의 왕국사(王國史)라 해도 상관이 없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이하 한국사). 반도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조선사, 또는 한국사 줄거리의 대부분은 평민(서민)들의 생활과 정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찌 보면 반민주적(反民主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지난 시대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일개 성씨(姓氏)의 왕실과 소수 추종 세력들간의 지루한 행보를 국사(國史)로 한다는 것도 착오적이다. 그렇다고 한국사의 전체와 부분을 정해놓은 원전(Text)들에 근거하여 진솔하게 해석 및 해설한 내용도 없다. 도모해야 정신세계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 때문에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지 조차 모른다. 명분과 체면 때문에 타인들이 설계해 놓고 기초작업을 해놓은 틀위에 규격미달의 불량 자재를 조립한 한국사의 건축물만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한국사의 원전(元典)이란 건축물은 그래도 부분적인 불량 자재들만 선별해 속아내면 아주 훌륭한 빌딩을 세울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일부 설계사들을 교체하고 공사 감독관 및 인부들을 재교육하면, 진도(震度) 7.0이상의 파괴성 강진에도 끄떡없을 도시의 한국사를 재건축 할 수 있었는데도 무지(無知)·해약·제도의 덪 때문에 재건축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우왕자왕이다.
한국사(韓國史)는 본래 대칸(大 )이 있었던 왕국(王國; 國)과 다르지 않고, 중화사의 황제(皇帝)와 일본사의 천황(天皇)표현과 같다. 단지 조선식 표기가 왕(王)이였을 뿐이다. 지존의 칸( :王)이란 표기도 흉노와 선비·돌궐(突胡:東胡)의 선우(선우:鮮于) 또는 가한(可汗)과 같고, 조정에서 말하는 유일한 주상(主上) 및 임금(王侯:잇금)과 쌍둥이 표현이다. 단지 종족 지역·종족별로 글자를 달리 썼을 뿐이다. 강단사학(제도권)에서 정해놓은 정사서(원전)인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한국사 내에 들어가 있는 모든 왕실과 조정(발해까지)의 위상과 성격은 모두 중화사의 황제와 일본사의 천황과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는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한국사(조선의 왕국)의 강역도 현세기에 열강들의 당뺏기 싸움에 휘말려 한반도 지역으로 한정되기는 했어도, 원전(元典)에 쓰여진 역사시대의 한국 강역과 문화·문명의 영향권이 반도로 한정될수 없다는 진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과연 진리와 진실은 힘있는 자들이 만드는 공작물인가? 더하여 조선의 왕국이었던 한국(韓國)이 동양(동방)의 문화와 문명을 창조하고 혜택을 준 주체(主 )였으며, 수혜를 받은 지체(支 )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반도는 반만년 한국사 강역중 일부로서 배달민족의 영역중 중심지여이 아닌데도 주입식으로 그런 줄 알아란 표현과 제도로 우겨 넣었다. 따라서 황하(黃河) 전유역이 조선(朝鮮)으로서 조선의 왕국인 한국(韓國)에 의해 콘트롤되고 있었다는 진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또 조선의 전영역(한국을 제외한 팔역〈八成〉)에는 돌궐·선비·몽고·왜(倭)등을 비롯한 수많은 크고 작은 부족·민족단위의 나라들이 있었고, 이들이 한국을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도 모르게 하였다. 이들이 변지에서 항하지대의 중원(中原)에 있었던 한국을 상대로 반란(反亂)을 일으켰던 여러 사건들도 반도가 한국사 영역으로 한정됨으로서 성격이 바뀌어 외침(外侵)이란 글자로 포장되었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현재의 여러 방언 형태의 중국어가 한국의 한글을 중심어로 하는 방언 및 지방별 언어라는 것도 숨겼다.
2. 다수의 강단(제도권)사학자 들은 오랜 세월을 제도권과 향유하며 내부 세포분열을 통해선배학도들의 선험적 연구만 계승 발전시킨 결과를 답습했다. 때문에 거대한 스케일의 대칸(대한(大汗)국 한국 역사는 반도라는 중병과 제도의 덫에 걸려 깊은 시름에 잠기게 만들었다. 이들은 한국사의 원전들을 해석·해설하면서 또 실증(實證)을 빙자한 유물과 유적을 거론하면서 반도 한국사란 도그마(독단)에 빠졌고, 직권과 직위도 충분히 활용되었다. 적극 활용은 남용의 선(線)을 이미 넘었고 스스로 주체를 못할 지경에서 헤매고 있다.
강당은 우선 역사서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 분열과 통합이라는 기본 공식에 의해 자리 잡게한 7C 후반의 신라 스케일을 반도에 담으면서, 신라에 예속된 117명의 제후(군공)와 293명의 열후(현령·현 )들을 반도에 우겨놓은 잘못을 저질렀고, 삼국사기에 의한 삼국의 정치 외교적 위상을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반도 해설의 삼국사(三國史) 때문에 거대한 황제국의 대신이었고 삼국사기의 저자였다는 김부식(金富軾)까지 사대주의자로 몰아 부쳤다. 그러나 진실은 반도를 역사의 고려강역으로 해설되면서 김부식도 억울하게 사대주의자로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그가 고관으로 재직했던 고려왕실과 조정은 '타직키스탄(대식국)·을량합(러시아남부)·섬라(태국)·대만·양자강 이남의 나라들로부터 늘 조공을 받았다. 또 주변의 나라들로 부터도 상국(황제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1만리 강역의 대(大) 고려였기 때문에 유학자 신분으로서 선조의 나라였던 삼국(三國:통일신라)의 정치 외교적 위상을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하국(下國)·피지배·피봉 위상으로 서술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제를 평정한 소정방이 신라 무열왕을 호칭할 때 대칸(大汗)인 대왕(大王)이라 했고, 아들인 법민(法敏)을 태자(太子)로 불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김부식을 어떻게 사대주의자 또는 모화(慕華)주의자로 만들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삼국(三國)이 설정된 고대사 분야부터 반도로 식재하기 위한 번역과 해서 작업은 고려(高麗史)로 이어져 황성(皇城)과 황도(皇都)를 가지고 있었으며 580여 제후와 열후를 거느리고 있었던 고려조차 얼기설기 반도로 엮어 놓았다. 즉 고려사라는 원문(原文)속의 고려는 그렇지 않은데, 제도권(강단) 학자와 대가들에 의한 번역과 해설서를 통해서 반도만을 고려의 황실과 조정이 있었던 곳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제도권 교육을 착실히 이수한 대부분의 반도 사람들은 한국사의 중세기를 가름하는 고려가 진짜 반도에만 있었던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반도에는 신라(7C 중반 이후)의 9주(九州)를 놓을 면적도 없지마, 5경(五京)을 비롯한 410명의 제후와 열후들의 자리조차 펼 곳이 없다. 하물며
고려의 8목(八牧)과 15부(府)에 예속된 580여 제후와 열후들이 있을만한 곳은 더더욱 없는데도 있었다고 해설하였고 강제로 주입시켰다. 요즈음도 요란한 덧씌우기와 색칠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후 대황제국 고려를 물려받은 근세조선 역시 나무랄 데 없는 대칸(大汗)의 나라이자 중원(中原)의 황제국으로서 한성부(漢城府)지역을 한국(韓國)의 직할지로 했다. 이성계(李成桂)로 시작하는 조선의 왕국인 한국(韓國)은 여러 민족과 종족들로 구성된 4백여 조선내의 제후들과 열후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중심이 되는 상국(上國)으로 존재했었다고 정사서에 분명히 쓰여져 있다. 외국(外國)과의 관계 형성도 고려시대와 비슷하여 지금의 베트남(点城:참파)에서 까지 상국으로 모셔지는 조공을 받을 정도로 광대했다고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데도 아니라고 억지를 쓴다.
아무튼 반도의 강단 사학은 한국사 원전에 쌓아놓은 정품이자 휼륭한 자재(資財)들을 모두 뒤로 빼돌리고 (위상·강역·소속변국·철학)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비품(備品)과 규격 미달 및 불량한 소모품(년도·왕명·인물·제도)만으로 한국사란 건물을 포장했다. 그러다 보니 거짓말을 해야했고 무리한 해석과 해설을 통해 품격 낮고 어울리지 않는 색칠도 했다. 유물 검증과 유적 재조사란 리허설을 통해 설계 변경을 유도했고, 역사의 일부를 수정하는 세도우 모션(호태왕비변조설·극동지방의 발해유적 발굴 등)도 여러 번 취했다. 이러다 보니 반도의 역사학(한국사)연구는 유물과 유적이 없으면 연구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약해 졌고 제도권 내에서조차 뒤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즉 역사학이 유물과 유적의 시녀 역할쯤으로 전락시켰다. 사실 반도엣 정사서 쓰여진 조선의 왕국들이자 한국(韓國)을 뜻하거나 상징하는 정품(精品:Choice goods)의 유물과 유적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다. 있을 수도 없지만 무엇인가 발견·발굴되었다면 그것은 조선왕국(한국)에서 퍼져나간 일부일 뿐이다. 한국의 문화·문명이란 영향권 내에 있는 반도 및 반도인의 흔적과 발자취 일뿐, 정사서에 의한 조선의 한국(왕국)인 들의 유물은 될 수가 없다. 한국 정사서에 올라있는 고구려·신라·발해·고려(왕씨)·근세조선(이씨)을 대표하는 한국(왕국:황국)들은 모두 황하(黃河)의 요충지에서 조선민족의 문화와 문명을 창출했기 때문에 반도에서 조선 왕국들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발굴될 일은 없다. 일명 황하 문명의 모두가 조선왕국이자 한국에서 이룩한 업적이다.
우리가 서둘러 한국사를 재건축 해야하는 이유는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개척정신(開拓精神)과 민족 고유의 선비정신(鮮卑情神:문무조화)으로 재무장하여 창의와 창조로 이어지는 싱그러운 한국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물(多勿)사상과 합쳐지고 철학(哲學)이 담겨진 새 한국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단과 제도의 보호를 위해 퇴색한지 오래된 실증주의란 도그마에서 한발 물러나 내부를 바라보면 반도 한국사란 원자(原子)가 근본적으로 불량 건축물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반도 한국사의 전반적인 내용들이 중화사와 일본사에 의해 조정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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