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복고의 시대, 무선호출기(일명 `삐삐`)가 다시 인기다.
동영상 서비스 등 휴대폰 서비스 품질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 한 켠에서 그동안 잊혀져가던 무선 호출기가 빠르고 `편리함의 구속`에 지친 사람들로부터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다.
삐삐란 애칭이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무선호출기는 한때는 통신문명의 이기로, 2030 세대의 필수품이었다. 1997년 당시 전국 가입자 1500만 명으로 `신화창조의 통신수단`으로 불렸던 무선호출기는 현재 전국적으로 12만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신화가 전설이 된 셈이다.
93학번인 김연우씨(31세ㆍ회사원). 연우씨는 대학시절 강의시간에 삐삐가 울려대는 통에 교수로부터 수업태도가 돼 있지 않다며 꾸지람을 듣고 강의실에서 내쫓겼던 기억이 있다.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의 `1010235`라는 숫자를 받고 밤잠을 설쳤던 것도 삐삐에 얽힌 추억중의 하나. 군 복무기간을 제외하고는 대학시절 내내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삐삐는 1998년 연우씨가 휴대폰을 개통하면서 서랍 속에서 기나긴 동면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최근 연우씨는 서랍을 정리하다 하다가 옛 삐삐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삐삐 가입자들이 모여 결성한 인터넷 까페인 `삐사모`(cafe.daum.net/ilovebeeper)를 발견했을 때 그 반가움이란 두말 하면 잔소리. 휴대폰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불편하기 그지없는 삐삐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연우씨의 구형 삐삐는 저속 제품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단말기란다. 그래도 연우씨는 내친김에 새 삐삐를 구입해 무선호출 서비스에 다시 가입할 생각이다.
업무 성격상 삐삐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병원 등 특수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이들 이외에 연우씨 같은 일반인들이 삐삐에 가입하고 자신들만의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경우가 최근 부쩍 늘고 있다. 지난 27일로 카페 개설 2주년을 맞은 `삐사모`에는 현재 1769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까페가 알려진 때문인지 요즘 들어서는 회원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식구수대로 삐삐가 있었던 탓에 집에 놀고 있는 삐삐가 여럿 된다는 권오민씨도 까페 가입 후 바로 삐삐를 재개통한 뒤 삐삐사진을 카페에 올려놓고 회원들과 친목을 다지고 있다.
핸드폰 요금을 감당하지 못해 저렴한 삐삐로 바꾸려한다는 사연부터 삐삐로 연인만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사연이나, 남들은 쓰지 않는 삐삐로 튀어보려 한다는 사연까지 가입동기는 가지가지다. 그러나 남들은 사용하지 않는 삐삐를 사용하는 만큼 회원간의 유대감은 한층 끈끈하다는 것이 삐사모의 자랑.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012 무선 호출 서비스를 제공하는 리얼텔레콤의 한준식 팀장에 따르면, 삐삐 가입자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작년 4ㆍ4분기부터 안정세를 찾았다. 012 가입자는 12만명 수준으로 이 가운데 6만명은 증권ㆍ교통정보 등 무선호출망을 통한 서비스가입자들이고, 6만명은 순수 삐삐 가입자다.
전국 삐삐 가입자 1500만명 시대 때와 비교하면 가입자 수야 비교할 수도 없지만, 충성도 차원에서는 그야말로 열혈 가입자들만 남아있다는 것이 한 팀장의 설명이다.
새해 들어 갖고 있던 휴대폰을 과감하게 해지하고 삐삐 사용자가 된 회사원 최도진씨는 삐삐를 개통한 후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TV며 각종 매체에 온통 번호이동성에 대한 휴대폰 서비스 회사들의 광고가 넘쳐나는 마당에 삐삐에 가입하겠다고 하니까 남들이 모두 웃더군요. 하지만 삐삐를 사용한 이후 생활이 훨씬 여유로워졌어요. 그래서 요즘은 친구들에게도 권하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이상 가입자들이 웰빙(Well―Being)이나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가입하고 있다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가입자들은 튀기 위해 삐삐에 가입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이밖에 서로 맘에 맞는 짝을 찾기 위해서도 삐삐가 사용되기도 한다. 카페에 자신의 삐삐번호를 올려놓고 제발 `캔디삐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애교 섞인 요청 글을 남기는 것도 이 때문. `캔디삐삐`는 찾는 이가 없어 울리지 않는 삐삐를 뜻한다.
역시 012 호출서비스 가입자인 회사원 이희숙씨도 첨단 휴대폰을 말하는 이 시대에 삐삐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느긋하고 침착한 성품의 소유자일 것만 같다고 말한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생활을 여유를 찾고 싶거나 튀고싶거나 혹은 맘에 맞는 친구를 절실히 원한다면 휴대폰 대신 삐삐에 가입해 볼만하다. 012―222―0521, 012―500―1426, 012―1303―3733, 012―800―7836, 012―800―7836... 모두 맘에 맞는 삐삐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카페에 올려놓은 호출번호처럼 당신도 호출번호를 올리고 맘이 맞는 사람들의 호출을 받아 볼 수 있다.
허정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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