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100곳 넘게 지원… 이젠 면접만 봐도 감지덕지"
"원서에 빈칸 많으면 떨어진다" 다들 경력 뻥튀기
직장男 만나기도 힘들어 '결혼고시' 신조어 생겨
"대기업 취업은 로또… 출근한다면 지옥철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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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실업률 7%대 세자리 경쟁률 일반화
요즘 대기업 취업은 로또와 같다고 했다. 100여명 뽑는데 몇만명이 구름처럼 몰리는 시험장에 가 보면 시험 보기도 전에 기가 팍 질린다는 것이다. 또 대학 신입생 때부터 취업에 대비한 학점과 경력관리를 시작해야지 4학년 때 준비하면 이미 늦었다는 ‘1당4락’의 유행어도 떠돈다. 오늘도 취업전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 5명을 만났다.
▲ 토론 참석자(사진 왼쪽부터)
박혜령(朴惠玲·24):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98학번.
이인석(李仁碩·26):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96학번.
배하진(裵河鎭·25): 연세대 정외과 98학번.
봉민종(奉敏鍾·26): 홍익대 기계공학과 96학번.
하은경(河恩慶·25): 연세대 인문학부 97학번.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국제경영전공 4학기.
◆ “요즘 대기업 취업은 로또당첨”
=솔직히 입사지원서를 몇장 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부터 대충 100장은 넘은 것 같다. 면접은 10번 정도 봤다. 같은 기업에 3번이나 원서를 낸 적도 있다.
=지난주까지 28곳에 원서를 냈다. 지원한 회사와 날짜, 발표일 등을 컴퓨터의 엑셀 파일로 표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 깜빡하면 내가 어느 회사에 지원했는지, 발표가 언제인지 놓치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설마 서류전형을 통과하지 못할까 생각했는데, 막상 불합격 통보를 받고 보니 세상이 무서워졌다. 난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으나 부모님의 눈높이를 낮춰드려야 하는데 걱정이다.
=대기업 10여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전부 서류에서 물을 먹고 나니 이젠 면접만 시켜줘도 감지덕지할 정도다. 학벌 학점 토익성적 등 객관적인 '스펙(spec:조건)'이 나보다 월등한 사람들이 퍽퍽 나가떨어지는 걸 보고 취업난을 실감했다.
=일단 면접보러 오라는 곳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자신을 헐값에 넘겨서는 안 된다. 아직 ‘쓴맛’을 덜 보아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설프게 취업한 뒤 그만두지도 못 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선배들을 많이 봤다. 첫 직장은 잡기도 힘들지만 발을 빼기도 힘들지 않은가.
=한 구직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 대졸자들이 생각하는 초임 연봉이 2200만~2400만원 정도라고 한다. 아직 쓰라린 맛을 덜 봤거나 눈이 너무 높거나 겉멋이 든 게 아닌지 모르겠다.
=‘당신은 유능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와 기회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식의 매끈한 이메일 대신 좀 거칠더라도 ‘당신은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해준다면 비록 불합격했지만 그 기업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예정일을 넘어 궁금해 연락했는데 ‘바쁜데 왜 귀찮게 전화하느냐’는 식의 대접을 받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서럽다. PC방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씩 같은 화면을 클릭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을 알기나 할까?
=어렵게 인사담당자와 연결이 돼 결과를 물어봤더니 1주일 전에 전형이 다 끝나고 인턴십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고 했다. ‘떨어진 죄인’이라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한다. 단어 하나 선택에도 엄청나게 공을 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읽고 들어오는 면접관을 만나지 못했다. 1분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휙 훑어보더니 “자신의 장단점을 말해보라”고 묻는다. 질문 두세개로 사람을 온전히 평가할 수 있을까. 준비한 말을 다 못 하고 허탈하게 돌아선 적이 너무 많았다.
◆ 결혼이라는 도피처?
=SKY(서울·고려·연세)대는 몇 점, 중하위권·지방대는 몇 점 등 대학별 가산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숨이 나왔다. 대학이란 곳은 들어올 때도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더니 나갈 때까지 속을 썩인다. 지방대생, 여학생, 비인기학과 출신…. 아무리 노력해도 부서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 사회엔 너무 많다.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이 창의적이고 팍팍 튀는 인재를 구한다면서도 실제로는 검증된 명문대생을 선호한다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 상경계, 영어·중국어 등 어문계열은 언제나 유리하다.
=기업의 공개설명회도 일부 명문대학 위주로 열린다. 해당 학교의 추천서나 확인서를 받아야만 지원 가능하다. 타대생이 우겨서 원서를 낸다 한들 쳐다보기나 하겠는가? 제대로 된 공개설명회 한 번 들어보는 게 소원이다.
=일부 남학생들은 “너희는 결혼이라는 도피처가 있으니 좋겠다”고 말한다. “일자리 찾느라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말고 시집가는 게 상책”이라며 ‘태클’을 걸기도 한다. 제대로 된 직장 다니는 남자 만나 결혼하기가 쉽지 않아 ‘시집 고시’란 말도 나왔다.
◆ “출근길 만원 지하철도 행복할 것”
=점심시간에 거리에 나가보면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직장인들을 보게 된다. 별것도 아닌 게 왜 그리 멋있어 보이던지….
=TV를 보다 신경질이 나서 확 꺼버렸다. 내가 지원했다 떨어진 회사들의 광고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내가 속 좁은 인간인가?
=한 번 응시했다 떨어지면, 저 기업의 물건은 안 써야지 굳게 결심한다. 그런데 하도 많이 떨어지다 보니 안 쓰기로 결심한 물건이 너무 많아졌다. 이젠 외제만 써야 하나 고민이다.
=얼마 전 지긋지긋한 백수 생활을 청산한 친구가 “학생 때는 만원 지하철이 짜증났지만 요즘은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출근하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 나도 그들 사이에 끼고 싶다.
=어머니가 얼마 전 ‘내가 나서서 일자리 좀 알아볼까’라며 전화를 하셨다. 대학을 졸업하는 마당에 아직도 자식 노릇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 낙방 또 낙방 ‘블랙먼데이’
=연줄도 실력이 되는 시대다. 확실한 ‘끈’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언제 빈자리가 나올지 모르는 수시채용에서는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얼마 전 월요일이었다. 모 통신회사, 자동차판매회사, 해운회사 등 3곳에서 줄줄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아침 9시부터 몇 시간 간격으로 ‘아쉽게도 다음 기회에…’ 하는 이메일이 날라오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악몽 같은 ‘블랙먼데이’였다.
=나는 같은 회사에서 불합격 통보 메일을 연달아 5통이나 받은 적이 있다. 회사측의 실수였겠지만 마치 “넌 죽어도 합격 못 하니 절대 오지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번 받은 학점은 영원하다’는 말을 믿고 대학 4년간 학점에 온 정신을 쏟았다. 그래서 변변한 사회 경력이 하나도 없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보니 내가 가진 무기는 알량한 학점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꼭 그렇지도 않다. 휴학하고 모 기업에서 취업을 위해 인턴 경력도 쌓아봤지만 막상 취업전선에서는 동기들보다 1년 늦은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입사 지원서에 빈칸이 많을수록 서류전형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교내 아이디어 공모전 입상, 기업체 연수 등 받지도 않은 상이나 하지도 않은 경력을 쫙 적어낸다.
=요즘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다. 자기소개서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충만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렇게 쓰는 동안에도 내가 얼마나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있었던가.
우울한 대화가 끝난 뒤 이들은 “내년에는 새내기 직장인들의 특집에 당당히 나오고 싶다”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러나 한 참석자는 끝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내일 아침 토익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진행·정리=채성진기자 dudmi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