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억원으로 산 무죄.
얼마전 외신으로 각국에 타전된 뉴욕 부동산 재벌의 상속자 로버트 더스트(60) 사건은 '유전무죄'의 전형이다. 지난 11일 더스트는 모리스 블랙(71) 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상식을 뒤엎은 이 평결은 200만달러(약 24억원)를 받은 일급 변호팀이 벌인 '법률적 도박'의 결과였다.
지난 2001년 9월 텍사스 갤버스턴에서 살해혐의로 기소된 더스트 사건은 아무리 간단히 추려도 엽기 이상이다. 더스트는 재판에서 옆집에 사는 블랙이 자기 아파트에 침입해 권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옥신각신했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블랙은 죽어 있고, 집안이 피바다였다고 했다.
그 다음 처리가 기막히다.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는 더스트는 18시간에 걸쳐 톱과 망치로 블랙의 시신을 분해한 다음 갤버스턴 만에 내다버렸다. 그리고는 오하이오로 도망갔다. 블랙의 시신은 머리 부위만 제외된 채 토루소로 발견됐고 자동차에 3만8,000달러가 있는 데도 5달러짜리 샌드위치를 훔치다 잡힌 더스트는 갤버스턴으로 압송됐다.
더스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친구를 죽이지 않았다, 시체만 유기했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재판 내내 배심원들에게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라, 자기 집에 침입해 총을 겨누는 침입자에 대해 방어한 것만 생각하라"고 역설했다. 더스트의 행동은 정당방위였으며 사체유기부분은 사건의 쟁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다.
재판이 열린 텍사스주는 자기 재산과 생명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소지를 허가한 첫번째 주이며 정당방위에 관대하다는 것도 십분 이용했다. 또 블랙이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것도 증언을 통해 부각시켰다.
변호인단을 도와준 것은 블랙의 시체 중 머리 부위가 발견되지 않은 점이었다. 총을 맞았다고 여겨지는 머리 부위가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살인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진 것이다. 결국 여자 8명, 남자 4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렸다. 만약 유죄평결이 났다면 더스트는 최고 99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더스트는 이미 첫 아내 캐슬린 실종사건, 그 사건을 글로 쓰려던 작가 수잔의 살인사건 등에도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검찰은 "더스트가 2건의 살인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랙을 살해, 그 신분을 도용하려 했다"며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몰아붙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무죄 평결 후 언론들은 "지옥 같은 배심원 평결의 현장" "비싼 변호팀의 성과" "텍사스는 미국이 아닌가" 등의 표현을 쓰며 경악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더스트 본인이었다. 더스트는 변호사에게 "무죄라는 말을 들었나, 확실한가?"라고 확인한 뒤 200만달러 변호팀을 껴안았다.
셰익스피어가 모두 지옥에나 가라던 변호사들 덕분에 부동산 재벌은 지옥에서 살아났다. 하지만 사체토막 유기부분을 무시한 평결 결과는 영화 만큼이나 엽기적인 것 같다.
LA(미국)〓김홍숙 특파원 hskim@hot.co.kr